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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서양의 수학과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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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앞의 페이지들이 장 수가 많았던 것에서 볼 때, 다양한 관점에서 보아 수학은 자연과학의 전체를 보조하는 만큼 자기 자신만의 분야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중국 수학의 평가에 대한 결론은 현재 연구의 계획에서 무엇이 초점으로 기술될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대와 중세의 중국에서 수학은 과학에 대하여 명확히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수학과 과학이 질적으로 새로운 결합으로 연결되고 세상을 바꾸도록 운명지어졌을 때 르네상스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그리고 왜 이것이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제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다.
첫번째 해야할 일은 바라보는 시각을 바르게 갖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 소수의 수학적인 연구들은 그 이후에 나타난 발전에서 보이는 그 업적의 양과 힘에서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대 중국의 공헌을 현대 수학의 척도를 가지고 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작 단계를 거친 사람들의 위치에 두고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노력과 지적인 비판으로 재어보면, ”구장산술”의 저자나 ”천원술” 대수 창시자가 이룩한 일이 19세기 새로운 수학 분야를 연 사람들의 업적보다 덜 힘들었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앞선 페이지들이 운율적이었지만, 많은 관점에서 수학은 자연과학의 모든 것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그 자신의 분야를 항상 가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반드시 숙고해야 한다. 중국 수학의 평가에 대한 결론은 현재 연구의 계획에서 무엇이 초점으로 기술될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대와 중세의 중국에서 수학에서 과학의 관계가 명확히 무엇이었는가? 수학과 과학이 질적으로 새로운 결합으로 연결됐을때 르네상스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엇이 세상을 바꾸도록 운명지어졌는가? 그리고 왜 이것이 세계의 어느 다른 부분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런 것들이 요즘 거론되는 몇몇 질문들이다.
첫번째 해야할 일은 바라보는 시각의 정확함을 갖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 소수의 수학적인 연구들은 그 이후에 자리한 부와 힘의 발전에서의 업적과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대 중국의 논문에서 현대 수학의 척도를 제재로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초기 단계를 거친 사람들의 위치에 두고 그것이 그들(초기단계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간 노동과 지적인 비판에 관하여 재어보면, 누구도 19세기 새로운 수학 분야를 연 사람들보다 ”진경산수”의 저자나 ”Thien Yuan” 대수학 창시자의 업적이 덜 힘들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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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고대 중국의 수학과 그 시대의 바빌로니아나 이집트, 인도, 아랍의 수학이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에 기술된 설명이 중국 수학이 또한 르네상스 이전의 구세계 중세인들의 수학과 충분히 견줄만 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C1: 현재 남아있는 부분에 -> 이 절에(?) C2: 현재 남아있는 부분에 ->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기하학에서 보여지는 더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특징만 보더라도 그리스의 수학은 의심할 여지 없이 높은 수준이었다. C: -> 유클리드에게서 보여지는 더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특징만 본다면, 그리스의 수학은 의심할 여지 없이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의 수학은 인도와 중국이 뛰어난 분야(더 정확히는, 아마도 바빌로니아의 수학을 토대로한)즉, 대수학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하고(->서투르고) 발전이 더뎠다. ‘더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특징 만’ – 이라는 그들 스스로의 말은 그리스인의 사고의 핵심이 되었다. C1: ‘더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특징 만’ – 이라는 그들 스스로의 말(추상적이고 체계적인)은 기구(machine=그리스 사람들의 생각하는 도구로서의 machine)의 열쇠(주요 요소)이다. C2: 이 부분은 조금 문학적인 표현 같은데… 이러한 그들 스스로의 말은 기구(machine=그리스 사람들의 생각하는 도구로서의 machine)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쯤으로 번역하면 어떨지…-김영욱 . C3: (교수님 말씀을 참고해서 생각해 봤는데 추상성과 체계성이 그리스인들의 과학과 수학의 기본 토대라는 의미인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그렇다, 체계성에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추상성은 전적으로 이득 뿐이었을까? 과학사가들은 그리스의 과학과 수학이 이론적, 경험적, 실용적인 것보다는 지나치게 추상적, 추론적인 것에 치우친 것이 전적으로 이익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있다. Whitehead의 말에 따르면 :
- very good 김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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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이 수학의 기초적인 부분을 발견했고 거기에 우리가 어려운 부분을 덛붙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 반대가 사실에 더 가깝다: 즉, 그들은 수학의 고급스러운 부분에 관심이 있었지 결코 그것의 기초적인 것들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Weirerstrass의 리미트 이론과 Cantor의 점집합이론은 그리스식 사고 방식과 더 결부되어 있지, 현대적 산수나 양수 음수의 이론, 함수관계의 그래프 표현이나 대수적 변수 같은 현대적 사고 방식과 더 밀접한 것이 아니다. 기초적인 수학은 현대사상의 가장 특징적인 창조물 중 하나이다: 특히 이론과 실제를 상호 밀접하게 연결짓는 힘으로부터 나오는 특징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고대와 중세 중국 수학이 구체적인 세계를 다루는 수법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이어서 더 어려운 수법)의 기초를 놓는데 어디까지 도움이 되었는가를 앞의 절들이 잘 설명했으면 하는 것이다. 실제에서 순수 지식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국수학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이 수학의 원리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단지 그들은 수학의 본질에 있어 진보된 부분들을 첨가시켜 온 것이다. 그 반대가 이 상황에 보다 더 가깝다. 그들은 수학 본질의 진보된 부분에 관심이 있었지 결코 그 원리들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Weirerstrass의 리미트 이론과 Cantor의 집합론은 현대수학, 현대정수이론, 함수관계의 도표 표현 또는 대수의 변이에 관한 현대의 사고 방식 보다는 그리스 사고 방식과 더 결부되어 있다. 수학의 원리는 현대사고의 가장 특징적인 창조 중 하나이며, 이론과 실습을 상호 밀접하게 연결짓는 방법의 힘이 현대사고의 특징이다.
고대와 중세 중국 수학의 거리는 수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것을 더 힘들게 하였다, 왜냐하면 가장 간단하고 기초적 기법인 구체적 보편집합을 다루는 것이 우리가 바라듯 이전 수학의 영역에 의해 명확시 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습에서 순수 지식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국수학은 개입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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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그 Section(p.1) 처음에 언급되어졌던 저자들의 의문점과 불확실한 점에 대한 답 몇 개가 여기있다. 좀 더 지식을 가진 평자들은 우리가 더 완전히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결점들에 관심을 가졌다. 三上Mikami는 고대 중국 수학적 사고에서 가장 큰 결함은 정확한 증명사고의 부재라고 생각했고, 이것을 (최근의 傅斯年Fu Ssu-Nien과 같은 현대 중국 학자들 처럼) 중국에서 발전에 실패한 형식적 논리 및 중국을 지배한 관념적이고 유기적인 사고에 서로 연관시켰다. Cajori는 그가 지은 수학기호사(數學記號史)에서 천원술天元術 대수에 대하여 평하면서, 그것의 훌륭한 대칭성과 극도의 한계성에 놀랐다고 했다. 초기의 폭발적 진보 후에, 宋의 대수학의 진보는 빠르지도 지속적이지도 못했다. 그는 +13세기 후에 정체에 빠진 것은 융통성 없고 제한된 표시법 때문이라고 했다. 비록 여러 면에서 매우 발전했었지만 (예를 들면, 10진법과 “공백”으로서의 0의 매우 빠른 인식), 중국 수학자들은 식을 표현하는 어떤 기호를 사용하는 방법도 발명하지 못했고, 예수회 신부들이Jesuits 수학을 전할 때까지 수학은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수학적 표시법의 유래,Thien Yuan 대수학논문 에서 평가하는 Cajori는 그것의 훌륭한 대칭과 극도의 한계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고 말한다. 활반한 진보 추기 후에, the Sung(송나라) 대수학 논문의 학술은 빠른 깨달음과 확대된 발전을 하지 못했다. 기원후 13세기 후에 현상유지에 이르렀고, 그는 융통성이 없고 제한된 표시법에 원인을 두었다. 게다가, 비록 그렇게 많은 점에서 제시했지만(예를 들어 10진법 자리값과 0, “공백”의 매우 빠른 인식)중국 수학자들은 결코 공식으로 나타내는 상징적인 어떤것을 고안하지 못했고, Jesuits의 출현시기까지, 수학적인 진술들은 주로 문자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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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대수학을 공부한 사람들 중에는 등식의 형태가 암시적으로만 사용되었고, 중국 고유의 등호()기호는 개발되지 않았다. ((등호(
) 고유의 표시물은 없었다. ))
널리 보급된 산판과 주판의 사용이 얼마나 이를 (등호 개발을) 저해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미결상태이다. ((계산판과 금지 요소로 의결된 주판의 사용이 얼마나 널리 보급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한 논점이다.))
그들은 정답에 도달하게 하는 중간단계의 기록을 남겨놓지 않음으로써 확실하게 계산의 흔적을 없앴다. ((그들은 정답에 도달하게 하는 중간단계의 기록을 남겨놓지 않기위해 확실하게 흔적없이 계산을 없애는 것을 허락했다. ))
그러나, 더 현대적인 수학으로 발전했다면 계산에 대한 기계적이 보조도구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즉, 더 현대적인 수학으로 발전했더라도 계산에 대한 기계적이 보조도구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수학의 방법이 발전했었더라면 본질적으로 무엇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 계산에 기계적인 도움이었는지는 여겨지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중국 역사 내내 주된 수학의 중요성이 달력과의 관계였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그 시대의 달력을 고치거나 그러한 일을 돕도록 요청 받지 않았던 수학자를 『疇人傳』에서 찾기는 힘들것이다. 고대의 우주철학 신념의 총체와 관련된 몇가지 이유에서, 달력의 확립은 황제의 특권으로 조심스럽게 지켜졌고, 또 속국에서 달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다. 반란이나 기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종종 달력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결론지어졌고, 수학자들은 달력을 만들도록 요청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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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우선적인 임무는 그들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추상적인 생각을 막고 구체적인 수에만 매이게 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어쨌든, 실질적이고 경험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천재성은 그런 방향으로 기울었다. 달력 분야에서, 수학은 사회적으로는 정설이고 유교적이었지만, 수학이 또 정통이 아닌 도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2세기에 徐岳은 분명히 도교의 영향을 받았고, 이것은 李冶를 고취시킨 11세기의 신비의 책에서 알 수 있다. 게다가 宋의 蕭道存에는 이상한 도표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십중팔구는 동시대인인 위대한 연단술사 葛洪과 수학자 孫子 같은 개인 사이의 접촉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사상의 접촉은 르네상스 전에는 (다른) 어디서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는 중국인의‘자연의 법칙’에 대한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직전 책의 끝부분(Sect.18)에서 상세히 연구했다. 여기서는 단지 다음만 되풀이해서 지적해 둔다: 즉, 창조신 즉 최고 입법자라는 idea의 부재와, 전 우주는 유기적이고 자체 충족하는 시스템이라는 확실한 신념(도교 철학자에 의해 Lucretius풍의 고상한 시에서 표현된)으로 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질서’라는 개념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의 법칙은 포함할 여지가 없었고 따라서 현세에 수학을 적용하여 이득이 될 규칙성도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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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에 걸쳐 중국 고유의 수학에 계속 머무르면서 우리는 수학의 연속적인 단계와 그것들의 질에 대해서 잠깐 되돌아보아도 좋다. 수학적 성취가 두드러졌던 두 왕조는 漢한나라(the Han)와 宋송나라(the Sung)이다. 落下閎Lohsia Hung과 劉歆Liu Hsin의 시대인 기원전 1세기동안 구장산술은 지식의 훌륭한 주요체였다. 이것은 천년이상동안 중국의 계산담당관의 업무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인 기원으로 볼 때 관료정치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지배계급이 해결해야하는 (또는 다른사람들을 설득해서 해결해야할) 문제에만 이용되었다. 토지측량과 조사, 곡창지대의 면적, 둑과 운하의 건설, 세금징수, 교환율 – 이것들은 가장 중요해 보이는 실질적인 문제들이다. ‘수학을 위한’ 수학은 정말 거의 없었다. 이것은 중국의 계산가(수학자)들이 진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추상적으로 조직된 이론적인 진실 또한 아니다. 이 모든 시간에 걸쳐 대중들은 문맹으로 남아있었고, 정부가 의뢰하고 필사하여 행정구역상의 다양한 분기점으로 배포한 필사본들은 구해 보지 못했다. ((정부가 의뢰한 필사본에 대한 접근 없이 행정구역상의 다양한 분기점으로 베껴서 분배했다.))
- very good 김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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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들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지와는 상관없이 문학적 숙련과정에 있는 학자들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면에서 번성했다. 그것은 오로지 11세기경의 Shen Kua가 매우 예외적인 인물이어서, 아마 필경사들에게 그의 이론을 필사케했을 위대한 건축가인 Yu Hao의 목조건축술인 Mu Ching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교와 불교의 영향아래 놓여있던 몇세기전, 다른 미술가들은 그들이 인쇄술을 개발했던 시대적 상황을 뒤집는 결정적 발자취를 남겼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위대한 수학자 계층이나 평민 계층 또는 하위관리 계층 누구나 전통 관료적 편견보다 훨씬 넓은 분야를 발전시켰던 시기인 송(宋)대에 중국수학의 두번째 번성기를 촉진시켰다. 이제 지적호기심은 광범위하게 만족될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승기는 계속 지속되지 않았다. Tsu Chhung-Chih가 쓴 Chui Shu의 지난 모든 사본들의 필체를 연습했던 유학자들은 명(明)대의 국가주의자들의 비호속에 그러한 힘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그리고 수학자들은 다시 지방관청의 뒷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이러한 시기에 중국에 당도했을때, 과거 중국의 수학적 영광에 대해 그들에게 알려줄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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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르네상스에 유럽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그로써 계산하는 자연과학이 발생한 것인가? 그럼 왜 중국에서는 이것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만약 근대 과학이 왜 한 문명에서만 발전한 것인지 알아내기가 어렵다면, 왜 다른 쪽에서 발전하지 않은 것인지 알아내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부재에 대한 연구는 실재에 밝은 빛을 던져줄 수 있다. 과학과 수학의 연합의 문제는 사실, 근대 과학이 왜 유럽에서만 발전했는지에 대한 전체 문제를 밝히는 유일한 다른 방법이다. Pledge는 그가 Galileo(자연과학의 계산에서 중심의 숫자가 고려되어져야만 하는)를 Leonardo da Vinci와 비교하는 목표를 잡았다. 후대에서의 Leonardo에 대한 본성과 뛰어난 것에 대한 깊은 통찰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발전이 없는 것은, 그의 수학의 부족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금 Leonardo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추측하는 그런 고립된 천재가 아니다. Zilsel, Gille와 다른 사람들이 본대로 그는 15세기~16세기의 유능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15세기~16세기의 뛰어난 사람들은 Brunelleschi같은 예술가 겸 엔지니어와 건축가들과 Tartaglia같은 포수, Ambroise Pare같은 외과의, Agricola에서 소리를 발견한 광부들, 1638년 갈릴레오의 발견을 설치한 베니스의 무기고의 조선가들과 화약제분업자들과 Biringuccio로 대표되는 화학공학자들도 있다. 또한 자철광 위에서의 William Gilbert의 일에 깊이 고무된 Rovert Norman같은 기계공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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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모두는 자연현상을 연구하고 대부분은 후에 수학공식에 적용될 데이터들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중국의 광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Sung Ying Hsing, 건축가 Li Chieh, 약사 Li Shih-Chen, 원예가 Chhen Hao-Tzu, 포수 Chiao Yu와 같은 중국 대응인물이 있었다. 시계공학적인 면에서 de Dondi 와 Su Sung의 대응관계와 같이 누구든 어떤분야를 선택하면 그에 대등인물이 있다. 그라나 유럽에서는 중국과 달리 어떤 영향으로 실용적인 지식과 수학 공식이 접합되었다.
Gabriel Harvey 가 +1593년에 쓴 바와 같이 이야기의 일부는 이러한 변화가 유럽 기술자들의 공동체를 존경하게 만들었는지를 분명하게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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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기계공 Humphrey Cole, 조선공 Matthew Baker, 건축가 John Shute, 항해사 Robert Norman, 포수 William Bourne, 약제사 John Hester나 이들 같이 교묘하고 솜씨있는 경험가를 떠올리며, 이들이 아무리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핬더라도, 산업현장의 이런 똑똑한 인력을 경멸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수학기계사 Humphrey Cole, 조선공 Matthew Baker, 건축가 John Shute, 항해사 Robert Norman, 포수 William Bourne, 화학자 John Hester, 또는 교활하고 음흉한 경험에만 의존하는 자들로 기억되는 이들은 학교나 책을 통해서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만약 이들이 숙련된 기계공들이나 그 어떤 숙달된 기술자들을 비난할 때에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Q:(옛날 영어라서 해석이 상당히 어색합니다. 교수님께 수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1600년대에 자석에 관한 William Gilbert의 저술은 학문적 training을 받은 학자에 의해 저술된 최초의 인쇄된 책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실험실에서 사람이 직접 행한 실험과 관찰에 토대를 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학적인 공식도 사용하지도 않았고, 자연법칙에 의거하여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던 Francis Bacon은, 인간 문명의 진보를 위하여 근대 과학적 연구가 인류문명의 발전에 근본적으로 중요함을 완전히 이해한 첫번째 역사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만간에 수학이 담당하게될 거대한 부분을 그 보다 더 잘 내다보지 못했다. ((기본적인 중요성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와 관련하여 글을 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수학’이 곧바로 적용될 수 있는 논문의 많은 부분들을 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중세의 수학은 아니다. Korye가 뉴턴-데카르트적 과학의 근원에 관한 그의 뛰어난 논문에 수학을 선보이면서, 수학은 스스로 변형되어야 했다. 수학의 실체는 물리학에 조금 더 가까워져야 했고, 운동에 맞추어져야 했으며, 그들의 존재 자체의 관점이 아니라 그들의 변화와 유동으로 관점을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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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적분학은 이 운동의 최고의 업적이었다. 1550년에 유럽 수학은 인도와 중국사람들의 발견에서 물려받은 아랍인들의 수학 보다 좀처럼 더 진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뒤를 이어서 몹시 놀라게 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들이 있었다. 즉, 1580년 Viete와 1557년 Recorde 에 의하여 마침내 만족할만큼 정교하게 정리된 대수 기수법, 1585년엔 Stevin에 의해 십진법의 완전한 이해, 1614년 Napier에 의한 로그의 발명, 1620년 Gunter에 의한 계산자, 1637년 Descartes에 의한 좌표,해석기하학의 설립, 1642년 Pascal에 의한 최초의 덧셈계산기, 그리고 1665년 Newton, 1684년 Leibniz의 무한소 계산법(미적분)의 업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이 발전에 내재하는 메카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전에 대수학은 인도사람들과 중국사람들 사이에서 기하학은 그리스 사람들과 그들의 계승자들 사이에서 따로따로 발생했던데 반해서 지금 두 개의 결합, 즉 기하학 분야에 대수학적 방법의 적용은 정밀과학의 진보에 있어서 일어났던 가장 훌륭한 한 단계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기하학이 그냥 기하학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의 논리적인 연역기하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하학이 그것으로서 기하학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기하학이었다는 것을 주의하는게 중요하다.)) 중국 사람들은 항상 기하학적인 문제들을 대수학적으로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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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레오에서 완벽한 형식을 갖추어 나타난 실험수학적 방법의 탄생과 현대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이끈 모든 것은 과학의 역사에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비록 우리가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하는 간단한 분석은 부적절한 것은 아닐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에, 정확히 어떻게, 수학과 과학이 통합될 수 있었는지 하는 것을 이로부터 조금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또, 중국에서 같이, 이전의 중세 사회에서 이 둘이 얼마나 서로 떨어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제 갈릴레오의 방법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 토론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가운데서, 정량적인 용어로 나타낼 수 있는 특정한 면을 뽑기. (b) 관측된 양에서부터 수학적 관계 (또는 이와 동등한 것)을 사용하여 가설을 구성하기. (c) 이 가설로부터 실제로 검증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어떤 결론을 이끌어냄. (d) 조건을 바꾼 후의 관찰과 더 나아간 관찰, 즉 실험. 가능한한 수치적 양을 사용한 측정을 포함한다. (e) (b)에서 구성한 가설의 채택 또는 기각 (받아들이거나 퇴짜놓기). (f) 채택된 가설은 다른 새로운 가설과 그의 검증의 시작점이 된다.
((갈릴레오의 형식에서 완벽한 것으로 표현된 실험-수학적 방법의 탄생과 현대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이끈 모든 것은 과학의 역사를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로 나타난다. 비록 우리가 정의할 수는 없으나 여기 있는 간단한 분석은 적당한 것이 아닐 것이지만, 르네상스시대에 어떻게 완전히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것이 통합될 수 있었는지 이것에 의해서 우리는 조금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얼마나 오랫동안 중세초기사회에 중국처럼 지속되었는지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찾은 갈릴리인들의 방법을 비평한다면 다음의 어구들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토론에 의한 현상인 발췌는 특정한 측면의 표현이 가능한 양적인 용어이다. 수학적인 관계(또는 그와 동등한 것)를 표현하는 가설에 의한 공식은 양을 나타내는 기호에 의해 논평된다. 가설로부터 기인한 특정 결과에 의한 연역법은 실용적인 입증의 범위 내에 있다. 조건의 변화에 의한 관찰은 더 심오한 관찰을 수반한다. 즉 관찰, 가능한 구체화된 것과 계산능력의 중요성에 관한 측정이다. 수락하는 것 또는 거절하는 것은 가설의 틀에 있다. 새로운 가설들과 제안들은 받아들여진 가설보다 검증되어져야 할 시작점을 수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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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철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은 현상 안에 측정 가능한 요소를 찾고 이러한 양적인 규칙성들에 수학적인 방법을 적용한다는 특징적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있었다. 질적인 세계는 양적인 세계로 대체되었다. ((양적인 세계는 질적인 세계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추상으로의 진행은 이것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왜냐하면 운동은 어떤 특정한 움직이는 물체들과 별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물체의 운동에는 그것의 다른 특성 혹은 성질과 관련된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있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운동(motion)는 우주 안 어디에서든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우주의 균질성은 동시에 어떤 의미로는 그것의 소멸 및 죽음 이었으므로 이것은 외관상 실로 근본적인 변화였다. ((Q: motion을 운동이라고 해석했는데 의미전달이 매우 불분명해보입니다. motion과, moving bodies 등을 어떤 방향으로 해석해야 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motion은 운동 moving body는 움직이는 물체 맞습니다.))
공간을 기하화(幾何化)하는 것과, 균질하고 추상적이고 차원있는 유클리드공간으로 갈릴레오 이전의 물리학, 천문학의 구체적이고 채별화된 장소연속체를 대체하는 것은, 형태학적인 우주의 청산이었다. ((공간의 기하학적 적용, 균질성의 대체 , 추상적인, 치수로 잴 수 있고, 갈릴레오 이전의 물리학, 천문학의 구체적이고 차별화된 장소 연속체로서의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은 형태학상 우주이였던 것의 청산이였다.))
사실 세계는 더 이상 질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분화된, 그리고 유한하고 계층적으로 질서잡힌 전체로 생각될 수 없었으며, 동일성과 단순하고 근본적인 법칙들의 보편적인 적용가능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열려있으며 불명확하고 심지어는 무한한 우주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세계는 더 이상 유한한 것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분화된 계층적인 전체로 생각될 수 없다.(Q: hierarchically ordered whole을 계층적인 전체로 해석했는데 막상 제가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열려있으며 불명확하고, 심지어는 무한한 우주는 동일성과 단순하고 근본적인 법칙들의 보편적인 응용가능성에 의해 단결된다.))
예를 들어, 일단 중력의 개념이 공식화 되면 우주 안에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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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장소를 향하여 가고자 하는 물체 고유의 경향을 부정하는 것은 물질적인 대상이 유기적인 통합체임을 깨트리는 일반적인 양상의 하나일 뿐임은 분명하다. 딩글이 말한 것처럼, 형태 무게, 색깔 그리고 운동이라는 특성이 치밀하게 조화된 명백한 통일체라고 생각되어서, 최상의 독창성을 가진 사람만이 몇 세기 동안의 실패에 의해 자극받아 이러한 통일체를 거부하고, 나무 공과 미지의 물질로 이루어진 혹성이 가진 공통성이 같은 공의 운동과 색깔보다 공통성이 더 많다고 주장하는 혁명적인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갈릴레오의 혁명은 중세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었고, 어느 정도 중국인들의 생각과도 같았던 유기적인 세계관을 파괴하고, 본질적으로 기계적이고 원자개념과 우연히 잘 맞아들어가게 되어 있는 세계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새로운 철학은 모든 것을 의심나게 한다. 불이라는 요소는 완전히 꺼졌다; 태양은 없어지고, 땅도 그리고 어떤 사람의 기지도 그것을 찾아야 하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이 세상이 끝났다고 말하고, 그 때 혹성과 하늘에서 그들이 찾는 것은 많은 새로운 것 … “그것은 모두 흩어지고, 일관성을 잃었으며; 모든 정당한 뒷받침도 또 모든 관계도 …
((사실 확실한 장소를 향하여 가고자 하는 육체의 타고난 경향들을 부정하는 것은 세속적 동기로 이루어진 조직적 통합을 깨뜨리는 일반적인 양상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딩글이 말한 것처럼 형태, 무게와 색채 그리고 움직임이라는 특성이 치밀하게 조화된 명백한 통일체라면, 몇세기 동안의 실패에 의해 자극받은 최상의 독창성을 가진 정신만이, 이러한 통일과 하나의 나무로 만들어진 정지된 지구와 미지의 물질로 된 하나의 행성이 모두 움직임과 색채를 지닌 지구 보다 더 낫다는 주장을 거절하는 혁명적 단계를 취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갈릴레오의 공전은 중세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어느 정도 중국인들의 생각과도 같았던 통합된 세계관을 파괴하고 존던이 표현한 세계관으로 대체하였다. 새로운 철학이 모든 것을 의심나게 한다. 불이라는 원소는 완전히 꺼져 버렸다 태양은 길을 잃고, 그래서 지구도 방황하며 인간은 지혜를 잃었다. 어디에서 그것을 찾아 인간의 길을 인도할 것인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 세상은 기진했다고 말한다. 행성들과 천공의 시대에 그들은 많은 새로운 것들을 추구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산산조각나고 연합은 사라졌다. 모든 정당한 공급과 관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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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우리의 시선이 항상 닿는 위대한 책인 우주에 쓰여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적힌 언어와 기호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 책은 수학적인 언어와 삼각형, 원 등의 기하학적 모양을 통해 쓰여 있으며, 이들의 도움 없이는 그 중 단 하나의 글자도 이해할 수 없고, 단지 공허한 검은 미궁 속에서 헤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 W. Strong은 Galileo 이전 시대와 그가 산 시대에 걸쳐서 수학이 우리가 이미 언급한 실학자이나 직공들에게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납득할 수 있게 보여주었다. 이들 중에서 Nicolo Tartaglia와 Simon Stevin과 같은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이었다. 그들은 화포술, 조선술, 수력학과 건축학 등에 걸친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이런 점들은 그들이 그들의 문제를 양적으로, 수학적 관점으로 적용하는 데에 이르게 했다. 그들은 측정과 법칙의 사람들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장인들은 Galileo가 움직임, 양적 규모의 측정과 같은 단순한 점에서 고립되었음을 당연히 깨달았어야 했다. 사실, Whitehead가 말했듯이 함수화에 대한 생각은 이미 등장했다. 특정 상태가 얼마나 변했는가는 그 효과의 결과가 얼마나 변했느냐와 상응한다고 생각해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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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어찌하였든, 기술자들과 장인들의 직관 실험은 갈릴레이식 실험 방법의 필수요소로 형성된 정확한 가설의 의식 실험 시험과는 다르지 않았었을까? 그러한 질문은 유럽사람들만큼 많은 중국인들을 포함한 숙련된 장인(우리는 아마도 그렇게 부를 것이다.)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다.
(a) 선택, 특별한 관점에서 토론한 현상으로부터의 것
(d) 관찰, 조건의 변화에 따르는, 또는 더 많은 관찰에 따르는-예를 들면 수의 광대함 내에서 측정 가능한 최대 범위 내에서의 실험, 구체화 등.
(b) 원시 형태 가설의 체계화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소들, 연금술사들의 3가지 주요원소, 또는 음양오행설에 관계된 것들)
(f) 공존하는 가설에 근거한 고려에 의해 너무 크게 영향 받지 않는 계속된 관찰과 실험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개인적인 접촉과 교육을 통해 기술적인 능력을 물려주는데 필요한 이론적인 설명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경험적인 방법 하에서는 매우 많은 양의 실용적인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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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간과 장소에 관해서는, 전문적인 기술이 성취된 정도를 따져보았을 때 중국과 유럽 사이에서 선택할 것도 없다. 어떠한 서양인들도 상나라 주나라 사람들 보다 청동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지 못했고, 당나라 송나라 도예가에 맞먹지 못했다. 길버트의 자력에 대한 결정적인 연구의 준비는 이미 다른 세계에서는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이 기술적인 활동들이 양적이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예가들은 어떤 온도 조절 없이는 광택효과와 본체와 색깔 등에서 그들의 효과를 결코 재현해낼 수 없었을 것이고, 만약 흙점술사들이 방위에 대한 관심이 없었더라면 자기편각에 대한 발견이 없었을것이기 때문이다. 그 절차들의 첫 번째 발걸음인 갈리리인과 장인들 둘다 그것에 대해 특별한 인식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몇몇의 글쓴이들이 강조해 왔듯이, 어떤 조직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수많은 흐름에서 특정한 현상만을 고립시키는 것은 하는 모든 실험에 고도의 인공적인 성질을 준다. 따라서 17세기 과학자들보다 훨씬 앞서 서양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중세 장인들이 그들 자신에게 보였던 어떤 사실에 대한 흥미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각각의 장인들이 한정된 기술에만 관심을 가졌기때문에 이것은 정말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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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또한 결과의 확립을 위한 실험반복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리스의 천문학자들은 대자연 속 천체현상들의 주기적인 재현에 의해 제공된 반복으로 꽤 성공을 거두었다. 중세시대의 장인들은(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유럽인들도) 현대물리학과 모든 지구상의 과학들을 위해 지구의 반복들과 알려진 다양한 단계들을 조직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Leonard의 이론은 이론상으로 부족해보였기에 가설설정의 분야에 반대는 늘 있었다. Duhem은 가스체 상태에 대한 설명을 한 후 대기와 불, 연기와 수증기 등에 대한 성취와 발명들, 즉 그가 연구하고 제안했던 거의 설명할 수 없어 보였던 것들을 중세 물리학에 스며들게 하였다. 그가 습도계, 헬리콥터 또는 원심력을 이용한 펌프에 대해 스케치를 하는 반면 젖은 넝마의 수분은 불로 향하는 본질적인 경향(왜냐하면 불은 물질이 타면서 그것과 더불어 가벼운 물질들을 수반하는 반종교적인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로 향하는 순수 원소의 상승을 수반하는 물질적인 부분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부분을 더 충분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눈에 띄는 기술적인 성취를 충분한 과학적 이론 없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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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러므로 중국의 상황을 해명하였고 이는 Galolean이 아닌 중국 고유의 과학과 Vincean의 기술에서 도달된 시점이라는 것을 정의하였다.
역사가들은 오래동안 계속 기원후 12세기의 중반은 유럽인 생각의 역사에 전환점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어느쪽 이든 이슬람 단어와의 새로운 접촉의 자극 때문에, 12세기와 13세기는 인간중심적인 상징과 떨어진 객관적인 자연에 본질적인 흥미를 둔 거대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이것은 모든 사상과 예술 분야에서 추적할 수 있는데 이는 신학, 전례, 극에서의 성장하는 고딕양식의 자연주의에서 새로운 현실주의의 떠오름까지이다. 현대 과학의 근원을 추적함으로써 이 자연주의의 움직임을 간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높은 예술가(?)는 단지 갈릴레오 전의 Galilean 방식의 부분을 지닌 조직이 아니다. 이는 오랫동안 유럽 학자의 철학 안에서 유지되어 왔다. 유럽 학자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되어 갈릴레오가 이끌어 레오나르도 다빈치까지의 실험을 향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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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의 지식과 논거의 지식 또는 실제의 문제를 구별했지만,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실험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했는지의 어떠한 확실한 근거를 주지 않았다. 옥스퍼드에서 13세기 초 철학자들은 그들 자신에게 자연현상의 깊은 이해의 가능성 안에서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많은 주의력은 가설의 형태와 그것들의 시험방법에 주어졌다. 이런 생각들이 연상되어지기 위해서 파두아의 대학에서 더 늦게 되었고, 그곳에서 Averroism은 강해지고 논리는 법이나 기술이 아니라 의학의 서두로써 연구되었다. 14세기와 16세기 사이에 그것의 논의는 수식화의 중요요소를 제외한 방법론의 이론에 유도되었고 갈릴레오의 최후의 실산에 어떤 유사성을 보여줬다. 그 이론은(파두아 regressus라 불리는) 어떤 것을 이것처럼 보이도록 상세히 분석했다:
a) 논의 아래 상세한 현상으로부터 보이는 그 모든 것의 공통이 되는(분석, 해결)특징의 선택, 자연의 균등성의 확신 그리고 시료의 표본 때문에 불필요하게 인식되어지는 완전한 계산
b) 이러한 특징(또한 해결)의 정수의 맥락에서 추리에 의한 특정한 원리의 귀납법
c) 이 가설적 원리의 상세한 결과의 연역법(생각의 종합, 구성)
d) 그 같은 것 또는 비슷한 관찰의 현상, 경험에 의한 증거 또는 반증 그리고 드문 경우에 해결된 실험에 의한 유도
e) 공식화된 그 가설의 원리의 수락 또는 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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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더 높은 artisanate(Q:artisanate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의 연습은 갈릴레오 방법의 차선의 또는 실험적인 부분에 가까웠던 반면 학자들의 이론화는 최선의 또는 사색적인 부분을 예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적 사실로 인한 동의가 의심스러운 가설의 궁극적인 검증이 된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알았는지, 또 그들이 이미 가설 검증의 요소로 쓰지 않은(어구 d에 있는) 새로운 현상 실험의 중요성을 항상 이해했는지 명백하지 않다.
더욱이, 그들은 그들의 가설의 원시적인 형태를 넘어서지 못했다. Robert Grosseteste of Lincoln 이 자연 철학의 중요 인물로 꼽히지만 귀납법과 연역법의 과정을 갈레노스와 그리스 기하학자의 것으로 돌아가 사용하였으며, 그것은 아마도 아라비아의 박식한 학자인 Abu Yusuf Yaqub ibn-Ishaq al-Kindi와 의학자 Ali ibn Ridwan의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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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Grosseteste가 앞으로 더 조직화된 실험이 가설을 검증하고 논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지라도 그것은 그자신이 실험자라는 것을 주장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물리학자인 영국사람 로거베이컨 과 토마스 브레드워딘 (1290-1349), 자기학자인 프랑스사람 브러스 브레그리너스 (1260-1270), 광학의 폴 위틀로(1230-1280), 그리고 무지개이론으로 인정받은 독일사람 테오도릭(1311)을 포함한 13세기 실용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들이 일하는 기간동안 중국이 꽤 비교할 수 있을만한 과학적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에 호기심을 가졌다. 하지만 14세기 초 후에 퇴화가 되었고, 갈릴레오 그 시대까지 언어적 싸움이 다시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다. 갈릴레오 시대 전보다 더 높은 예술성을 미리 암시했던 실용적인 활동을 한 독일인들이 대부분인 군사 공학가들이 많이 일어났음이 보여 지는 14세기와 15세기에 이 속도로 이론적인 과학이 고려되었다. 이 새로운 상의 창시자인 콘레드 키써 (1366-1405)와 그의 벨리포티스는 1390년에 시작했다. 하지만 더 빠른 형태가 같은 방법으로 선보여졌으며 특별히 기계와 전쟁무기를 만들어냈던 규이도 다 비게바노(1280-1345) 가 테오도릭이 죽은 후 20년밖에 지나지 않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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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ser는 총포와 화약의 새로운 기술들에게 영감의 일부분을 받은 Giovanni de fontana(1410~1420), 후스 전쟁의 익명의 기술자(1420~1433)과 Abraham of Memmingen(1422)등등의 다른 많은 기술자들에 의해 따라가게 됐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Roger bacon부터 Galileo까지 실험연구자들의 계보가 이어져 있다. 그러나 약 1310년이후로 학구적인 철학의 공헌은 멈춰 버렸다. 그리고 3세기 동안 실제적인 기술이 유행이 되었다.
누군가 13세기의 유럽의 학문이 발전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11세기와 12세기의 자연과학적 지식의 획득에 대한 신유교적 이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떠오를 것이다. 수많은 관찰(‘resolutio’의 두번째 부분)로 부터 구체적 원리의 귀납은 근원적인 또는 고유의 양식들의 관찰에 의한 신유교적 사고에서 대표적이다.누군가 이렇게 Hsu Heng(1209~1281)에게 말했다:
우리가 세상 만물의 양식들을 완전히 이해(규명)한다면, 세상 만물은 그것이 그것으로써의 이유를 가져야만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한 그것들이 순응할 수 밖에 없는 (다른 모든 것들의 공존에 대한) 규칙을 가져야만 하지 않습니까? 이 것은 양식에 의해 의미지어진 것들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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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u Heng은 기술적 용어들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한 이 말에 대하여 동의하였다.
우주의 모든 생물과 사건들의 시공간적 관계는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Li에 의해 결정된다. ‘어디든간에 li는 존재한다.’Chheung I-Chhuan이 말하였다. ‘동은 동이고 서는 서이다.’. 신유교주의자들의 귀납법 유사과정의 중요어구는 Ta Hsueh(Great Learning)의 본문으로부터 인용하였다. ‘지식의 확장이란 어떤것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그들에게는 이 문구가 자연과 또 많은 것들의 관계를 보는데에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였고 그에 따라 패턴의 구성성분들이 차츰 앞뒤가 맞기 시작하였다. 자연의 상징은 그들에게 맞춰지고 우주의 집계판에 의미있는 배열을 갖게 되는 것이다.
현상의 다양성에 존재하는 특정한 자연적 패턴들에 대한 우려는 ‘관계짓기’, ‘통찰하기’, ‘상호관계짓기’ 등의 과정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였다. 엽전 구멍에 실이 꿰어져 있는 그림을 상상해보면 된다. Chheung의 형제중 한명이 말하였듯 ‘사람이 말을 듣거나, 사건으로부터 배우면 그들의 지식은 여전히 그 말이나 사건에 한정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상호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Chheung의 또다른 서술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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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들을 충분히 이해(규명)하려 노력하는 중에 우리는 세상의 모든 무수한 현상들의 패턴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조사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 패턴들중에 오직 한개를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지도 않는다. 단지 많은 양의 현상에 대한 축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패턴들은 자연스레 명백해 질 것이다.
한가지 것이나 그것의 작은 그룹에 집중하는것은 자연과학의 방법이 아니라는 Chheng 형제들의 확신은 후에 과학적방법으로 검증했을때 중국학자들의 실패한 관점이라는 것이 특히 흥미롭다.
누군가 Chheng I-Chhaun에게 물었다 ‘모든것들을 조사하는 것이 필요합니까 아니면 한가지것을 조사함으로써 간단히 무수한 패턴들을 알수 있습니까?'(I-Chhuan이 대답했다) “아니오 대신에 이 경우에는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Yen Tzu도 오직한개의 것만을 조사해서는 모든것의 패턴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매일 한개를 조사한뒤에 다른걸 조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경험의 긴 축적 끝에 돌연 상호관계의 상태속에 있는 그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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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관찰은 외부자연학문을 대신하지 못한다. 또다시 누군가가 췡이촨 에게 물었다, “외부의것을 관찰하고 그 자신에대해 조사할 때, 어떤것에서 무언가가 벌써 발견되었는지 우리가 다시 재 확인 해야하나요?“ (그는 대답했다) ” 그문제를 그렇게 해결할 필요가 없단다. 외부세계와 그 자신은 한가지 큰 공통 방식이 있단다, 그것이 이해가 되었다면 이것은 확실히 이해가 되지. 이것이 우주 외부와 내부의 도란다.“ 학자는 모든 자연(극에서의 하늘의 고도와 지구의 밀도-)에 대해 관측하고 이해하려 노력해야한다 또 다르게는 작고(미세한)것이 왜 그런것인지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확장된 지식에서, 당신은 네개의 기원의 맨처음(지구의 패턴)을 찾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겠느냐? 철학자가 말했다. 그것들을 우리의 자연과 열정에서 찾는것은 물론 쉬운일이며 우리의 삶과 밀접해있다. 그러나 모든 풀 잎사귀와 모든 나무는 그들의 패턴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조사되어야한다. 조류,동물,식물과 나무의 명칭들(그리고 특성들)의 폭넓은 지식은 방식의 이해에 접근하는 한 방법이다. 만약 이것이 아직 자연과학의 르네상스가 아니라면 중세유럽 학자의 사상보다 더 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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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연역범의 역과정 원리는 규칙적인 무늬의 확장 또는 등급의 확장 안의 등가물을 가진 것 같다. 때로는 후자의 말은 유추에 의한 추론의 의견 안에 사용되었다.Chheng Ming- Tao는 이렇게 썼다: 무수한 것들이 모두 그들의 역을 가지고 있다; 좋은것과 나쁜것, 음과 양의 착렬이 있다. 양이 커지고 음이 작아질 때는 좋은것이 증가하고 사악한 것이 축소될 때 이다. 먼것과 넓은것은 이 규칙적인 무늬의 확대이다. 그리고 어떤 딴곳으로, 조직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그것의 무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완전히 샅샅이 연구하는 것의 물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무늬가 오직 하나의 내용에서만 완전히 이해된다면, 추론은 같은 등급의 다른 내용에 대해 만들 수 있다. 두 과정은 Chheng I-Chhuan의 말로 진술된 것처럼 보인다. 바깥쪽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는 것과 그것의 안쪽에서 잡는 것, 아마 이해로 불릴 것이다. 그것의 안쪽을 잡기 위한 것과 그것을 연결하기 위한 것은 무엇이 통합이라 불리는 것의 바깥쪽인지와 함께한다. 지금 통합과 이해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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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문제는 노르만사람과 Tartaglia과 반대로 중국에는 ‘뛰어난 장인’의 대표자들이 풍부했고,’ 또한 Grosseteste와 Paduans와 생각이 일치한 중세적인 사람이 있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은 면밀하게 유럽의 철학자를 근대의 유학자와 비교하기 위해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언제나 전의는 우리의 동정을 점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대조하고 있는 진술 2 권은 2 학교의 어느 것이 정말로 더 과학적으로 더 마음이 있었는지를 가리킬 수 있다.Thomas Aquinas(1226년에서 1274년까지)은 ‘그리고 가장 높은 것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낮은 것에 대한 가장 풍부한 지식보다 더 낫다’라고 썼다.Chheng Ming Tao(1032녕에서 1085까지)은 불교도에 대해 말하길: ‘그들이 법에대한 공부 없이 높은것을 이해하려 힘쓸 때 어떻게 높은 것의 이해가 옳은 것임은 알 수 있겠습니까?‘고 말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울 때 역사적 원인에 대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초자연적일 때 해지는 것을 위해 16세기와 17세기의 유럽의 모던 과학의 발전은 임시로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설명했다. 이 발전은 고립된 현상이 아니었다;그것은 르네상스와 개혁과 산업 제조가 따른 상인의 자본주의의 증가를 가지고 균등하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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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유럽에서만 병발한 사회적, 경제적의 동시의 변화가 자연 과학이 결국 더 높은 준 수학적 기술자들이(the semi mathematical technicians) 장인의 수준을 넘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일 것이다. 모든 질의 양으로서의 변형,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배후의 수학적 진실이 있다는 확언, 온 우주의 일정한 우주와 시간이 있다는 주장; 그것은 상인의 가치의 기준과 닮지 않았던가? 효용 (이익)도 상품도, 보석도 돈도 없었지만, 그것들은 계산되고 숫자, 양으로, 계량으로 교환될 수 있었다. 이들 중 많은 흔적을 우리의 수학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복식 부기의 기술의 학문상 공개는 16세기 초 Luca Pacioli의 [Summa de Arithmetica]라는 최고의 수학 교과서에 담겨있다. 복식 부기가 최초로 공공 재정과 행정에 적용된 것은 기술 수학자 Simon Stevin에 의해 이루어졌다. 심지어 Copernicus라는 사람도 금융 개혁에 관해 썼다. (그의 책 Monaetae Cudandae Ratio of 1552년) 등호가 최초로 쓰여진 Robert Recorde의 책은 ‘그들의 여행(Q;travell?)으로 인해 상품의 계속적인 증가’를 바라면서 ‘관료자들과 Moscovia로 가는 모든 벤처 기업들’에게 바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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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in의 Disme은 ‘모든 천문학자와 측량자와 태피스트리의 치수를 재는 사람과 배럴과 모든 조폐국장과 상인, 좋은 운’이란 단어로 연다. 심지어 대단하고 이기심이 없는 선교사의 친척인, Francesco Ricci는 +1659 년에 Macerata에 생각하는 것에 대한것을 출판했다. 막연히 그러한 예가 증대될 수 있었다. 상업과 산업은 ‘in the air’에 결코 있지않았다. 아마도 모던 과학과 기술 사이의 정확한 관계와 그것의 출생인 socio 경제 상황의 문제는 유럽의 과학 역사의 대단한 논쟁을 구성한다. 우리는 나중에 그것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때가 되면 토지 균분 론자 관료적인 도자기와 같은 유사한 문명에 대한 연구가 서쪽에서 분명히 할 것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면 Koyre 비판 에 있어서 포스트 르네상스 과학의 원인인 socio 경제 이론은 카시러와 함께 그리이스 수학의 알 수 있을 만큼 관념적이고 피타고라스 아래 재발견에 의하여 자극해 진 깨끗이 이론적인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사실의 확실한 부분이다. 또한 그는 부족하게 socio 경제 이론의 지지자가 이른바 천문학의 자치권이 있는 전개를 고려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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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위의 일련의 사건들과 비교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중국인들은 배의 역학, 그들의 넓은 수로를 위한 정수학(네덜란드인과 마찬가지로), 화력을 위한 탄도학(그들은 유럽보다 이미 4 세기 전에 화약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산을 위한 펌프와 같은 것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그들이 그렇지 않았다면 중국의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것에서 조금의 이익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의 기술과 산업은 위의 ‘semi-mathematical’ 단계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쓴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본질적으로 전통적이다. 이것은 수 세기동안 관료적인 억압 혹은 보호를 통해서 천천히 성장한 것으로 모험적인 상인이나 투기자가 큰 이윤을 추구한 것과 다르다. 하지만 천문학은 중국 제국에서 다른 어떤 단체보다 더 중요시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비록 기억은 되지 않지만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은 달력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음 과에서 볼 것으로, 중국의 천문학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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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천문학에 자율적인 진화가 일어나 자연과학을 수리적으로 설명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이 사건은 중국에서 일어 나야 할 것이다. 아니, 이미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들의 천문학이 충분한 경쟁력이 있었더라면 유럽에서만 이루어졌던 모든 발견이 당연히 중국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Q: (하지만 이것은 근대적인 과학이 설 수 있는 충분한 원동력이 되어주지 못했다.(이 부분 해석이 올바른지 알고싶습니다.)) 토착적인 중국의 수학은 무덤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Mei Ku-Chheng(?)의 후계자들이 이것을 다시 일으키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 전체에서 자연과학 분야에 대한 생동적인 요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에 대한 흥미는 충분하지 못했다. 통제된 실험은 부족했고, 경험적인 귀납도 충분하지 못했으며, eclipse에 대한 예견이나 달력 계산에 있어서도 매우 부족한 점을 드러냈다. 명백한 점은 중국의 중상주의 문화 하나 만큼은 농업을 중시하는 관료적 문명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완전히 구분되어 왔던 수학과 자연에 대한 지식의 퓨전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