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edham’s Math and Sci in China and the West 번역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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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서양의 수학과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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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앞의 페이지들이 장 수가 많았던 것에서 볼 때, 다양한 관점에서 보아 수학은 자연과학의 전체를 보조하는 만큼 자기 자신만의 분야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중국 수학의 평가에 대한 결론은 현재 연구의 계획에서 무엇이 초점으로 기술될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대와 중세의 중국에서 수학은 과학에 대하여 명확히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수학과 과학이 질적으로 새로운 결합으로 연결되고 세상을 바꾸도록 운명지어졌을 때 르네상스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그리고 왜 이것이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제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다.

첫번째 해야할 일은 바라보는 시각을 바르게 갖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 소수의 수학적인 연구들은 그 이후에 나타난 발전에서 보이는 그 업적의 양과 힘에서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대 중국의 공헌을 현대 수학의 척도를 가지고 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작 단계를 거친 사람들의 위치에 두고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노력과 지적인 비판으로 재어보면, ”구장산술”의 저자나 ”천원술” 대수 창시자가 이룩한 일이 19세기 새로운 수학 분야를 연 사람들의 업적보다 덜 힘들었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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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고대 중국의 수학과 그 시대의 바빌로니아나 이집트, 인도, 아랍의 수학이다. 이 절에에 기술된 설명이 중국 수학이 또한 르네상스 이전의 구세계 중세인들의 수학과 충분히 견줄만 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유클리드에게서 보여지는 더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특징만 본다면, 그리스의 수학은 의심할 여지 없이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의 수학은 인도와 중국이 뛰어난 분야(더 정확히는, 아마도 바빌로니아의 수학을 토대로한)즉, 대수학에서는 서투르고 발전이 더뎠다. ‘더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특징 만’ – 이라는 그들 스스로의 말은 그리스인의 사고의 핵심이 되었다.

그렇다, 체계성에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추상성은 전적으로 이득 뿐이었을까? 과학사가들은 그리스의 과학과 수학이 이론적, 경험적, 실용적인 것보다는 지나치게 추상적, 추론적인 것에 치우친 것이 전적으로 이익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있다. Whitehead의 말에 따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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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들이 수학의 기초적인 부분을 발견했고 거기에 우리가 어려운 부분을 덛붙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 반대가 사실에 더 가깝다: 즉, 그들은 수학의 고급스러운 부분에 관심이 있었지 결코 그것의 기초적인 것들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Weirerstrass의 리미트 이론과 Cantor의 점집합이론은 그리스식 사고 방식과 더 결부되어 있지, 현대적 산수나 양수 음수의 이론, 함수관계의 그래프 표현이나 대수적 변수 같은 현대적 사고 방식과 더 밀접한 것이 아니다. 기초적인 수학은 현대사상의 가장 특징적인 창조물 중 하나이다: 특히 이론과 실제를 상호 밀접하게 연결짓는 힘으로부터 나오는 특징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고대와 중세 중국 수학이 구체적인 세계를 다루는 수법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이어서 더 어려운 수법)의 기초를 놓는데 어디까지 도움이 되었는가를 앞의 절들이 잘 설명했으면 하는 것이다. 실제에서 순수 지식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국수학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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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그 Section(p.1) 처음에 언급되어졌던 저자들의 의문점과 불확실한 점에 대한 답 몇 개가 여기있다. 좀 더 지식을 가진 평자들은 우리가 더 완전히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결점들에 관심을 가졌다. 三上Mikami는 고대 중국 수학적 사고에서 가장 큰 결함은 정확한 증명사고의 부재라고 생각했고, 이것을 (최근의 傅斯年Fu Ssu-Nien과 같은 현대 중국 학자들 처럼) 중국에서 발전에 실패한 형식적 논리 및 중국을 지배한 관념적이고 유기적인 사고에 서로 연관시켰다. Cajori는 그가 지은 수학기호사(數學記號史)에서 천원술天元術 대수에 대하여 평하면서, 그것의 훌륭한 대칭성과 극도의 한계성에 놀랐다고 했다. 초기의 폭발적 진보 후에, 宋의 대수학의 진보는 빠르지도 지속적이지도 못했다. 그는 +13세기 후에 정체에 빠진 것은 융통성 없고 제한된 표시법 때문이라고 했다. 비록 여러 면에서 매우 발전했었지만 (예를 들면, 10진법과 “공백”으로서의 0의 매우 빠른 인식), 중국 수학자들은 식을 표현하는 어떤 기호를 사용하는 방법도 발명하지 못했고, 예수회 신부들이Jesuits 수학을 전할 때까지 수학은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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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대수학을 공부한 사람들 중에는 등식의 형태가 암시적으로만 사용되었고, 중국 고유의 등호(=)기호는 개발되지 않았다. 널리 보급된 산판과 주판의 사용이 얼마나 이를 (등호 개발을) 저해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미결상태이다. 그들은 정답에 도달하게 하는 중간단계의 기록을 남겨놓지 않음으로써 확실하게 계산의 흔적을 없앴다. 그러나, 더 현대적인 수학으로 발전했다면 계산에 대한 기계적이 보조도구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즉, 더 현대적인 수학으로 발전했더라도 계산에 대한 기계적이 보조도구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중국 역사 내내 주된 수학의 중요성이 달력과의 관계였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그 시대의 달력을 고치거나 그러한 일을 돕도록 요청 받지 않았던 수학자를 『疇人傳』에서 찾기는 힘들것이다. 고대의 우주철학 신념의 총체와 관련된 몇가지 이유에서, 달력의 확립은 황제의 특권으로 조심스럽게 지켜졌고, 또 속국에서 달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다. 반란이나 기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종종 달력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결론지어졌고, 수학자들은 달력을 만들도록 요청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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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우선적인 임무는 그들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추상적인 생각을 막고 구체적인 수에만 매이게 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어쨌든, 실질적이고 경험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천재성은 그런 방향으로 기울었다. 달력 분야에서, 수학은 사회적으로는 정설이고 유교적이었지만, 수학이 또 정통이 아닌 도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2세기에 徐岳은 분명히 도교의 영향을 받았고, 이것은 李冶를 고취시킨 11세기의 신비의 책에서 알 수 있다. 게다가 宋의 蕭道存에는 이상한 도표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십중팔구는 동시대인인 위대한 연단술사 葛洪과 수학자 孫子 같은 개인 사이의 접촉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사상의 접촉은 르네상스 전에는 (다른) 어디서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는 중국인의‘자연의 법칙’에 대한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직전 책의 끝부분(Sect.18)에서 상세히 연구했다. 여기서는 단지 다음만 되풀이해서 지적해 둔다: 즉, 창조신 즉 최고 입법자라는 idea의 부재와, 전 우주는 유기적이고 자체 충족하는 시스템이라는 확실한 신념(도교 철학자에 의해 Lucretius풍의 고상한 시에서 표현된)으로 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질서’라는 개념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의 법칙은 포함할 여지가 없었고 따라서 현세에 수학을 적용하여 이득이 될 규칙성도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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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에 걸쳐 중국 고유의 수학에 계속 머무르면서 우리는 수학의 연속적인 단계와 그것들의 질에 대해서 잠깐 되돌아보아도 좋다. 수학적 성취가 두드러졌던 두 왕조는 漢한나라(the Han)와 宋송나라(the Sung)이다. 落下閎Lohsia Hung과 劉歆Liu Hsin의 시대인 기원전 1세기동안 구장산술은 지식의 훌륭한 주요체였다. 이것은 천년이상동안 중국의 계산담당관의 업무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인 기원으로 볼 때 관료정치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지배계급이 해결해야하는 (또는 다른사람들을 설득해서 해결해야할) 문제에만 이용되었다. 토지측량과 조사, 곡창지대의 면적, 둑과 운하의 건설, 세금징수, 교환율 – 이것들은 가장 중요해 보이는 실질적인 문제들이다. ‘수학을 위한’ 수학은 정말 거의 없었다. 이것은 중국의 계산가(수학자)들이 진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추상적으로 조직된 이론적인 진실 또한 아니다. 이 모든 시간에 걸쳐 대중들은 문맹으로 남아있었고, 정부가 의뢰하고 필사하여 행정구역상의 다양한 분기점으로 배포한 필사본들은 구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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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 하겠습니다.

미술공예가들은 (얼마나 대단히 재능 있는가와 상관없이) 그들을 문학적 훈련을 받은 학자에게서 분리시켜 놓은 보이지 않은 벽의 다른 한편에서 번성했다. 이것은 오직 11세기 경의 Shen Kua가 위대한 건축가인 Yu Hao (그는 십중팔구 필경자(손으로 쓰는 카피리스트)에게 이것을 받아쓰게 했어야만 했을 것이다.)의 Mu Ching(목조건축술)을 알아차릴 만큼 매우 예외 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미술공예가들은, 몇 세기 전, 도교와 불교의 영향 아래서, 이런 상황이 (그들이 인쇄술 발견한 것) 폭발할만한 결정적인 단계를 밟았다./폭발할만한 결정적인 단계를 밟았다.”’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진보해 나가게 된다./”’ 이것은 의심할 것 없이 중국수학의 두번째 전성기를 조성하였는데, Sung 에서, 진실로 대단한 수학자 그룹(그들 스스로 평민이나 하급관리)이 영역을 전통적인 관료적 선취(선점)보다 더 넓게 진출하기 시작했을 때였다.”’전통적으로 선점하고 있던 관료 분야에서 더 넓게 진출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제 지적호기심은 매우 만족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Tsu Chhung-Chih가 쓴 Chui Shu의 지난 모든 사본들의 필체를 연습해오던 유학자들은 명나라의 민족주의자 반발속에 힘을 잃었다. 그리고 수학자들은 다시 지방 관청의 뒷방으로 제한되었다. 선교사들이 들어왔을때, 그들에게 중국의 과거 수학적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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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수식화된 자연과학이 태어나므로 인해서 유럽의 르네상스 때에 벌어진 그것은 무엇인가”’?/수학적인 자연과학이 실용화되는 유럽의 르네상스때 벌어진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중국에서는 왜 일어나지 않을 것일까? 만약 근대 과학이 한 문명세계에서 왜 발전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면, 다른 문명세계에서 왜 발전하지 않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발전하지 않은 것을 연구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의미있기는 하지만 수식화된 자연과학의 문제는 왜 근대과학이 유럽에서만 발달하였는지에 대한 문제 전체에 대해서 기술하는 하나의 다른 방법일 뿐인 것이 당연하다”’./다시 말해서 수식화된 자연과학의 번성에 대한 문제는/”’

Pledge가”’Pledge는”’ Galilreo (자연과학의 수학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되는)와 Leonardo Da Vinci를 대조했을 때, 후자의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실험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후자가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였고 탁월한 실험을 했음에도”’, 더 이상의 발전이 따르지 않은 것은 그의 수학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그는 결론에 도달했다.”’말하며 결론에 도달한다.”’ 현재의 Leonardo는 많은 사람들이 이끌려 추측하는 그런 고립된 천재가 아니다. 그는, Zilsel이나 Gille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15, 16세기의 솜씨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솜씨 있는 사람들은 – Brunelleschi같은 예술가 겸 기술자와 건축가; Cellini같은 예술가 겸 야금술사; Tartaglia같은 포수; Ambroise Pare같은 외과의사; Agricola에서 음을 발견한 광부들; 1638년에 Galileo의 발견을 이용했던 베니스 병기고의 조선기사들; Biringuccio로 대표되는 화약제분업자들과 다른 화공학자들; 1581년의 새로운 발명품이 William Gilbert의 자석에 대한 연구에 매우 큰 자극을 받았던 Robert Norman같은 악기제조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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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 번역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열심히 자연 현상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그들 대부분은 수학 공식의 매력적인 접근을 위해 실험 데이타를 만들어냈다. 간단히 말해, 그들에게는 중국의 아그리코라라 불리는 Sung Ying-Hsing, 건축가 Li Shin-Chen, 약제학의 왕 Li Shih-Chen, 원예가 Chhen Hao-Tzu, 포수 Chiao Yu와 같이 대응 되는 인물이 있었다. 시계 공학적인 측면에서 de Dondi와 Su Sung의 대응 관계처럼 어떤분야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면 그에 대응되는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이러한 단계가 충분치않아 어떤 일에대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이러한 단계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어떤 분야에 대해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실용적인 지식, 양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경험 그리고 수학적인 공식들 사이를 접합시키기 위해 어떠한 요소를 첨가하였던 것이다. Gabriel Harvey가 1953년에 쓴 것 처럼 이야기의 일부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유럽의 기술자들의 관계를 존경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사회적 변화가 존경받을 만한(뛰어난)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조합(길드)를 만들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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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밀기계공 Humphrey Cole, 조선공 Matthew Baker, 건축가 John Shute, 항해사 Robert Norman, 포수 William Bourne, 약제사 John Hester나 이들 같이 교묘하고 솜씨있는 경험가를 떠올리며, 이들이 아무리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핬더라도, 산업현장의 이런 똑똑한 인력을 경멸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1600년대에 자석에 관한 William Gilbert의 저술은 학문적 training을 받은 학자에 의해 저술된 최초의 인쇄된 책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실험실에서 사람이 직접 행한 실험과 관찰에 토대를 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학적인 공식도 사용하지도 않았고, 자연법칙에 의거하여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던 Francis Bacon은, 인간 문명의 진보를 위하여 근대 과학적 연구가 인류문명의 발전에 근본적으로 중요함을 완전히 이해한 첫번째 역사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만간에 수학이 담당하게될 거대한 부분을 그 보다 더 잘 내다보지 못했다.

물론 중세의 수학은 아니다. Korye가 뉴턴-데카르트적 과학의 근원에 관한 그의 뛰어난 논문에 수학을 선보이면서, 수학은 스스로 변형되어야 했다. 수학의 실체는 물리학에 조금 더 가까워져야 했고, 운동에 맞추어져야 했으며, 그들의 존재 자체의 관점이 아니라 그들의 변화와 유동으로 관점을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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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적분학은 이 운동의 최고의 업적이었다. 1550년에 유럽 수학은 인도와 중국사람들의 발견에서 물려받은 아랍인들의 수학 보다 좀처럼 더 진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뒤를 이어서 몹시 놀라게 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들이 있었다. 즉, 1580년 Viete와 1557년 Recorde 에 의하여 마침내 만족할만큼 정교하게 정리된 대수 기수법, 1585년엔 Stevin에 의해 십진법의 완전한 이해, 1614년 Napier에 의한 로그의 발명, 1620년 Gunter에 의한 계산자, 1637년 Descartes에 의한 좌표,해석기하학의 설립, 1642년 Pascal에 의한 최초의 덧셈계산기, 그리고 1665년 Newton, 1684년 Leibniz의 무한소 계산법(미적분)의 업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이 발전에 내재하는 메카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전에 대수학은 인도사람들과 중국사람들 사이에서 기하학은 그리스 사람들과 그들의 계승자들 사이에서 따로따로 발생했던데 반해서 지금 두 개의 결합, 즉 기하학 분야에 대수학적 방법의 적용은 정밀과학의 진보에 있어서 일어났던 가장 훌륭한 한 단계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기하학이 그냥 기하학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의 논리적인 연역기하학이라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항상 기하학적인 문제들을 대수학적으로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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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레오에서 완벽한 형식을 갖추어 나타난 실험수학적 방법의 탄생과 현대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이끈 모든 것은 과학의 역사에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비록 우리가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하는 간단한 분석은 부적절한 것은 아닐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에, 정확히 어떻게, 수학과 과학이 통합될 수 있었는지 하는 것을 이로부터 조금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또, 중국에서 같이, 이전의 중세 사회에서 이 둘이 얼마나 서로 떨어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제 갈릴레오의 방법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 토론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가운데서, 정량적인 용어로 나타낼 수 있는 특정한 면을 뽑기. (b) 관측된 양에서부터 수학적 관계 (또는 이와 동등한 것)을 사용하여 가설을 구성하기. (c) 이 가설로부터 실제로 검증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어떤 결론을 이끌어냄. (d) 조건을 바꾼 후의 관찰과 더 나아간 관찰, 즉 실험. 가능한한 수치적 양을 사용한 측정을 포함한다. (e) (b)에서 구성한 가설의 채택 또는 기각 (받아들이거나 퇴짜놓기). (f) 채택된 가설은 다른 새로운 가설과 그의 검증의 시작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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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철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은 현상 안에 측정 가능한 요소를 찾고 이러한 양적인 규칙성들에 수학적인 방법을 적용한다는 특징적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있었다. 질적인 세계는 양적인 세계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추상으로의 진행은 이것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왜냐하면 운동은 어떤 특정한 움직이는 물체들과 별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물체의 운동에는 그것의 다른 특성 혹은 성질과 관련된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있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운동(motion)는 우주 안 어디에서든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우주의 균질성은 동시에 어떤 의미로는 그것의 소멸 및 죽음 이었으므로 이것은 외관상 실로 근본적인 변화였다. 공간을 기하화(幾何化)하는 것과, 균질하고 추상적이고 차원있는 유클리드공간으로 갈릴레오 이전의 물리학, 천문학의 구체적이고 채별화된 장소연속체를 대체하는 것은, 형태학적인 우주의 청산이었다. 사실 세계는 더 이상 질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분화된, 그리고 유한하고 계층적으로 질서잡힌 전체로 생각될 수 없었으며, 동일성과 단순하고 근본적인 법칙들의 보편적인 적용가능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열려있으며 불명확하고 심지어는 무한한 우주라고 생각되었다. 예를 들어, 일단 중력의 개념이 공식화 되면 우주 안에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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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장소를 향하여 가고자 하는 물체 고유의 경향을 부정하는 것은 물질적인 대상이 유기적인 통합체임을 깨트리는 일반적인 양상의 하나일 뿐임은 분명하다. 딩글이 말한 것처럼, 형태 무게, 색깔 그리고 운동이라는 특성이 치밀하게 조화된 명백한 통일체라고 생각되어서, 최상의 독창성을 가진 사람만이 몇 세기 동안의 실패에 의해 자극받아 이러한 통일체를 거부하고, 나무 공과 미지의 물질로 이루어진 혹성이 가진 공통성이 같은 공의 운동과 색깔보다 공통성이 더 많다고 주장하는 혁명적인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갈릴레오의 혁명은 중세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었고, 어느 정도 중국인들의 생각과도 같았던 유기적인 세계관을 파괴하고, 본질적으로 기계적이고 원자개념과 우연히 잘 맞아들어가게 되어 있는 세계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새로운 철학은 모든 것을 의심나게 한다. 불이라는 요소는 완전히 꺼졌다; 태양은 없어지고, 땅도 그리고 어떤 사람의 기지도 그것을 찾아야 하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이 세상이 끝났다고 말하고, 그 때 혹성과 하늘에서 그들이 찾는 것은 많은 새로운 것 … “그것은 모두 흩어지고, 일관성을 잃었으며; 모든 정당한 뒷받침도 또 모든 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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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 번역입니다.

하지만 뉴턴 자신이 죽을 즈음에, 궁극적으로 기계적인 시각을 바꾸거나 고치려고 운명지어진, 세상의 새로운 유기체적 관점의 씨앗이 라이프니츠에 의해 싹텄다는 운명의 극적인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아마 이것들 중 몇몇은 중국에서 유래되었을 테지만, 이는 여기서는 조사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논쟁이다.

형성된 가설이 수학적인 가설(위의 (b)단계)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은 굉장한 중요성을 지닌다. 수학은 그 당시 가능했던 일관된 논리 중에서 가장 크고 명확한 것이었다. 실험의 논리가 수학적 표현에 전적으로 기반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은 윌리엄 하베이와 J.B. 반 헬몬트부터 클로드 베르나르까지의 생리학과, 또한 화학까지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해졌다. 하지만 이것은 모델을 형성했다. 가설이 수학화된 기원을 중심으로 많은 논의들이 일어났지만, 그 역사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수학화된 가설의 기원을 둘러싼 많은 논의들이 중심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 역사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쿠아레와 그의 잘 알려진 책에서의 버트는 수학적인 구조처럼 세계를 보는 관점에서 실증되고 있으며 피치노와 노바라 같은 사람들을 통해 전달된,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준 영향의 지속성을 강조하고 있다./쿠아레와 그의 잘 알려진 책에서의 버트는 ”’수학적인 설계로써의 세계관을 예증하는”’ 그리고 피치노와 노바라 같은 사람들을 통해 전달된 ”’피타고라스학파와와 플라톤학파의 영향의 영속성을 역설하고 있다.”’/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그리스 작가들의 재발견에서 오는 특정한 자극 뿐만 아니라, 천문학에서 수학의 끊임없는 중요성이 또한 존재한다. 갈릴레오는 확실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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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조 번역입니다.

철학은 우리의 관점에 바탕을 둔 훌륭한 책들에 기술되어졌지만 ( 나는 우주를 의미한다 ) 우리는 언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것에 기록된 기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철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철학은 우리가 주시하기(인지) 전에 놓여진(쓰여진) 그”’ 훌륭한 책에 기술되어있지만 (나는 ”’세계”’를 의미한다) ”’먼저 그 언어를”’ 배우고 그 책에 씌여진 기호들을 잡지(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 책은 수학적 언어로 기술되어있고 기호들은 삼각형, 원, 그리고 다른 기하학의 체계이며 이들의 도움없이는 한 단어라도 이해하는데 불가능할 것이며, 이 도움이 없다면 어두운 미로에서 공허하게 방황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W.Strong은 갈릴레오 이전과 그의 일생동안 수학이 우리가 미리 언급해 온 실용적인 기술인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활용되어졌다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E.W.Strong은 갈릴레오 ”’이전, 그리고 그의”’ 일생동안 수학이 우리가 ”’이미”’ 언급해 온 실용적인 기술인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활용되어졌다고 ”’설득력있게”’ 설명해준다/ Nicolo Tartaglia 와 Simon Stevin 과 같은 , 이들 중 몇몇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최고의 수학자로 일컬어진다. 건설 기술, 수력 공업, 조선업, 총기 제조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후에 수학자들은 그들의 문제들을 철저하게 수치적인 계산에 의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했다./”’그들의 관심은”’ 건설 기술, 수력 공업, 조선업, 총기 제조 분야에 있었고, ”’초대된(아마도 어떤일을 위해 초청된)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그들의 문제를 정량적 수학적으로 적용(해결)하였다”’./ 그들은 측정과 법칙의 사람들이었다. 가장 훌륭한 르네상스의 기술가들은 위에 나와있는(c) 문장에서 움직임과 문단에서 숫자상의 크기 측정과 같은 단순한 점에서 갈릴레오가 능숙치 못하다 것을 충분히 자연스럽게 발견할 것이다. 사실 Whitehead 가 말해온 것처럼 함수화의 개념은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특별한 조건의 변화의 폭이 생산된 다양한 효과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 지를 직시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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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조 번역입니다.

‘수학은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자연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상상적인 생각의 근원을 제공했다. 갈릴레오가 법칙을 만들었다. 데카르트가 법칙을 만들었다. 호이겐이 법칙을 만들었다. 뉴튼이 법칙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연 현상사이에서의 관계를 보여주는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것들(곡선)과 적합한 공식들을 발견해나갔다. 아마도 갈릴게오의 혁신은 학구적인 이론과 실용 기술의 융합으로 가장 잘 묘사될 것이다. 이 결합을 통해 도출된 결과가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모든 측면에서 유일무이하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한다. 다소 유사한 종류의 상황들이 각각 새로운 것을 만드는 낮은 단계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Eliade가 지적했던 것처럼, 헬레니스틱한(그리스의) 연금술은, 화학의 발전을 위해 그것의 기술을 들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신비하고 지식적인 철학과 실용적인 화학의 장인기술의 융합이었다./Eliade가 지적했던 것처럼, 헬레니스틱한(그리스의) 연금술은, ”’화학의 발전을 위한 그것의 기술적 수입(도입)을 모두 포함하여”’, 신비하고 지식적인 철학과 실용적인 화학의 장인기술의 융합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초기의 예시인, 자연의 도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철학자들과 마술 기술자들인 샤머니즘주의자들과의 동맹에서 제시하는 최초의 과학적 도의 기원에 익숙하다./그리고 우리는 초기의 예시인, ”’은둔”’ 철학자들과 마술 기술자들인 샤머니즘주의자들과의 동맹에서 제시하는 최초의 과학적 도의 기원에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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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번역입니다

뉴턴은 공식을 만들었다.’ 모든 학자들이 자연현상과 관련한 함수를 그리고 거기에 적합한 방정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갈릴레오의 과학혁신은 기술적인 실험과 학구적인 이론의 결합으로 가장 적절히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방대한 업적들이 이러한 연관성에서 파생되어 나왔지만, 그러한 모든 측면이 전부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생산해내면서, 더 낮은 계층에서 다소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었다. 엘리아데가 지적했듯이, 헬레니즘의 연금술은, 화학의 발전을 위해 기술을 수입함과 더불어, 실용적인 화학에 대한 장인정신과 밀교, 그노시스 철학의 결합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사례를 살펴보면, 도교의 원시-과학은 샤머니즘의 주술사 및 기술자와 도교(자연의 도)의 수행자와의 결합이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기술자와 장인의 직관적인 실험이 갈릴레오식의 본질을 형성한 정밀한 가설의 의식적인 실험과 달랐을까? 이 질문은 아주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수공예업자들은(그렇게 부르기로 가정하고) 유럽인만큼 많은 중국인을 포함하였다.”’유럽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수의 중국의 수공예업자들(그렇게 부르기로 가정하고)에게 그 지룬은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분석되면, 아래와 같은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a) 토론 중인 현상에서, 특정한 측면의 선택 (d) 조건의 변화에 수반되는, 즉, 더욱 세부적인 관찰에 수반되는 관찰- 즉, 실험법, 구체화시키기, 가능하다면, 절대광도 측정까지 (b) 원시적인 유형의 가설형성(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 연금술사의 3주요 원소(*역주-수은. 황. 염)나 음양오행설) (f) 동시대의 가설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지속적인 관찰과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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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번역입니다

이론적 근거의 부족 때문에 개별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그 다음 세대까지 기술적인 측면을 연구할 필요성이 있었지만, 이러한 실증적인 방식으로 상당한 실용적인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가능했다. 여러 세대와 장소와 관련하여, 중국과 유럽 사이에 성취된 기술력의 수준에 현격한 차이가 없었다; 서양에서 샹과 초우의 청동-제작을 능가하거나, 도자기공인 탕과 성의 기술에 버금가는 사람이 없었다. 길버트의 자기장에 대한 확정적인 연구는 구세계(동반구)의 다른 끝 쪽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도자기공들이 온도조절을 통하지 않고 도자기의 색이나 광의 효과를 산출하였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기술적인 작용이 비-수량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며, 풍수사가 방위를 살펴주면서 보조하지 않았더라면, 자기편차의 발견이 불가능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절차의 첫 번째 단계는, 갈릴레오 학파와 수공예업자들 모두, 주목을 받지 못하고 지나가버렸다./해석이 안된 부분입니다. ”’조직화된 연구의 흐름과는 별도로 특정 현상의 고립은 인공적인 특성이 정교하게 가미된 모든 분야의 실험에 참고 되었다고 많은 사가들은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중세의 수공예가들(그리스인과는 다른)이 그들 스스로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한 관심은 17세기의 과학자들 보다 더 과거의 서구에서처러 중국에서도 나타났다. 게다가 그것들은 장인들과 수공예가들이 제한된 분야와 단체에만 관심을 보인데서 더욱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19와 20을 구분을 잘 할 수가 없어서. 나중에 확인하실 때 구분 좀 해 주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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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

이러한 사람들은 또한 다른 일도 하였는데, 결과의 확실성을 위해서 실험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리스의 천문학이 굉장히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대자연 속에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천체 현상의 재현으로 인한 반복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의 장인들(유럽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까지) 또한 지구상의 반복과 현대 물리학과 모든 지구상의 과학의 기반이 되었던 알려진 다양한 단계들을 체계화하는데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다소 이론적으로 부족했던 Leonardo의 이론은 가설 설정의 영역에서 제약이 있었다. Duhem은 자신이 이루어 낸 가스체 상태와 관련된 성취와 발견을 기술하고 나서 그의 공기, 불,연기, 수증기에 대한 생각들이 중세 물리학에 스며들었다는 것과 그가 이뤄낸 것과 제안한 것들이 거의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가 습도계, 헬리콥터 또는 원심력을 이용한 펌프에 대해 스케치를 하는 동안, 그는 젖은 융단의 수분이 본질적으로 불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것의 덜 물질적인 부분이”’더 가벼운 부분이”’ 하늘을 향해 상승함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의 이유는 불이 마치 종교적인 성질처럼 가벼운 것들을 위로 옮겨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을 좀 더 충분히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적당한 과학적 이론이 없이 비상한 기술적 성과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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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조 번역 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중국의 상황에 대한 관점을 제공하여 주며 또한 Galilean이 아닌 Vincean으로서 중국 고유의 과학과 기술이 이룩된 시점을 알려 준다. 그러나 유럽에 정확하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아직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12세기 중반이 유럽인들의 사상이 발전한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인식하여 왔다. 이슬람 세계와의 새로운 접촉으로 인한 자극 때문이었는지 또는 아니었다 하더러도 12세기와 13세기에 인간중심적인 상징주의와는 달리 객관적인 자연에 본질적인 흥미를 갖는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모든 사상과 예술 분야, 즉 발전하고 있던 고딕 양식의 돌 조각 자연주의부터 신학, 예배식 및 희곡에서 새롭게 태동하던 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확인이 가능하다. 현대 과학의 근원을 추적하는데 이 자연주의의 움직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 높은 artisanate만이”’높은 수준의 수공예가들만이”’ 갈릴레오 전의 Galilean 방식을 따라서 한 조직이 아니었다. 이는 오랫동안 유럽의 스콜라 철학 안에서 유지되어 왔으며 유럽의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되어 레오나르도를 거쳐 갈릴레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실험이 계속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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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조 번역입니다. (정세현, 신민철)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의 지식과 논거의 지식 또는 실제의 문제를 구별했지만,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실험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했는지 어떤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지 않았다. 옥스퍼드의 13세기 초 철학자들은 그들 스스로 자연현상의 깊은 이해의 가능성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가설의 형태와 그것의 시험방법에”’전제 조건과 실험 방법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생각들은 후에 Padua(Averroism이 강했고, 논리를 의학의 서두로 공부하나, 법과 신학을 공부하지않는)의 대학교와 관련되었다. 14~16세기까지 그곳에서 논의되어진것은 수식화의 중요한 요소를 제외한 갈릴레오의 마지막 실산과 어떤연관성을 보여주는 방법론을 이끌었다. 분석된 그 이론은 (Padua regressus라 불리는) 다음과 같다.

a) 논의 아래 상세한 현상으로부터, 모든것의 공통점으로 보이는 특징의 선택, 자연의 동일성과 표본의 태표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불필요하게 인식되는 완전한 계산.

b) 이들 특징의 본질적 내용 추론에 의한 특정한 원리의 귀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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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조 번역입니다.

(c’) 이 가설적인 정의의 상세한 결과를 추론(생각에 있어서의 종합, 합성) (d’) 근거나 반증을 이끌어내기 위해 동일한 혹은 비슷한 현상을 관찰. 이것은 경험에 의해 그리고 드문 경우에는 정돈된 실험에 의해 이루어짐. (e’) (b’) 단계에서 공식화 된 가설적인 정의를 수락 혹은 폐기.

그러므로 더 고등한 기계공들의 업무가 Galilean의 방식의 부가적인 혹은 실험적인 부분과 유사했던 반면에, 학자들의 이론을 세우는 방식은 최선의 혹은 추론적인 부분에 있어서 전조가 되었다. 그러나 경험적인 사실에 대한 동의가 궁극적으로 가설을 검증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폭넓게 인식을 하고 있었는지는”’그들이 얼마나 동의하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들이 검증 하의 가설의 자원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단락 (d’)에 나오는 새로운 현상들을 검토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항상 이해하고 있었는지 역시 명백하지가 않다.”’단락 d에 나오는 것 처럼 그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은 가설을 새로운 현상에 대입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의 가설에 있어서 구식의 방식을 뛰어넘어 더 나은 방향으로 진전시키는 데에 좀처럼 성공하지 못하였다. Robert Grosseteste of Lincoln(1168~1253)은 이러한 자연철학에 있어서의 주요인물로 뽑혀왔다. 하지만 귀납과 추론이라는 이원적인 과정은 Galen과 그리스의 기하학자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박식한 학자인 Abu Yusuf Ya’qub ibn-Ishaq al-Kindi(873)나 의학 논평가인 Ali ibn Ridwan(998~1061)와 같은 아라비아의 인들을 통해 Grosseteste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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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조 번역입니다.

비록 Grosseteste가 단순히 더 폭넓은 경험을 넘어선 조직화된 실험이 가설을 입증 또는 반증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스스로가 실험주의자였다고 주장할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는 물리학 분야의 영국사람 Roger Bacon(1214~1292)과 Thomas Bradwardine(1290~1349), 자기학 분야의 프랑스사람 Petrus Peregrinus(1260~1270), 광학 분야의 Pole Witelo(1230~1280), 그리고 훌륭한 무지개 이론을 내었던 프랑스사람 Theodoric of Freiburg(1311)등을 포함한 13세기 실용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연구하던 당시의 기간동안에 중국에서도 견주어질 만한 과학적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은 기이한 사실이다. 그러나 14세기 초기가 지난 후에 이것은 두드러지게 퇴화가 되었고, Galileo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언어적인 논쟁만이 또 다시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론적인 과학에 관해서는 그러한 속도의 발전이 사실이었는데 왜냐하면 14세 후반과 15세기 무렵에 주로 독일에서 군인공병들의 증가가 일어났고 그들의 실용적인 업적은 Galileo 이전 시대의 세기의 더 높은 기계공들의 업적의 전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의 시조는 Konrad Kyeser(1366~1405)와 그의 저서 Bellifortis이며 1396년에 시작하였다. 하지만 더 이전의 인물들도 그러한 방식을 보여주며 특히 Guido da Vigevano(1280~1345)가 대표적인데 기계와 전쟁무기에 관한 그의 작업은 Theodoric of Freiburg가 죽은 후 오직 20년이 지난 후에 끝이 난 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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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 번역입니다.

Giovanni de fontana(1410~1420), Hussite 전쟁(1420~1433)에서의 익명 공학자, Abraham of Memmingen(1422)등 많은 과학 기술자들이 Keysar를 따랐다. 이들은 총포와 화약에 대한 새로운 기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리하여 유럽에서는 Roger bacon에서 Galileo까지 실험주의 사조가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1310년대 이후로 학문적인 철학의 공헌은 멈춰 버렸고, 이후 300년 동안은 실용적인 기술이 지배적인 사조가 되었다.

누군가는 11세기와 12세기에 자연과학적 지식의 획득에 대해 신유교주의자들이 세운 학설이 13세기의 유럽 스콜라 철학자들의 그것보다 덜 진보되었다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신유교적 사고에서는, 수많은 관찰에서 비롯된 특정한 원리에 대해 소개하는 것(b’, resolutio의 두번째 부분)이 잠재적이거나 고유한 양식을 찾는 일의 표본이다. 어떤 사람이 Hsu Heng(1209~1281)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양식을 파악(말 그대로 철저히 규명)한다면, 모든 것에는 그 자체로서의 이유와 따를 수밖에 없는 (다른 모든 것들과 공존하는)규칙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 ‘양식’이라고 의미지어진 것이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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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조 번역내용입니다.

Hsu Heng은 사용된 기술적 용어에 대한 의미를 매우 분명히 한 이 말에 대해 동의하였다. 우주의 모든 생물과 사건들의 시공간적 관계는 도처에 존재하는 li의 표명에 의해 결정된다. ‘Chheng I-Chhuan (1033~1108) 이 말하였다.’어디든간에 li는 존재한다.’동은 동이고 서는 서이다.’ 귀납법에 유사한 과정을 위한 신유학자들의 중요 어구는 Ta Hsueh(Great Learning)의 본문 약 260 페이지에 있는 “지식의 확장은 어떤 사물의 연구에 달려있다.” 는 말에서 인용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자연과 어떤 사물들간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갑작스런 통찰을 의미하였고, 마치 패턴의 구성요소들이 갑자기 ‘뒤가 맞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자연의 형상은 그들 스스로가 우주의 집계판 안에서 의미있는 배열로 조화시켰다.

현상의 다양성에 존재하는 뚜렷한 자연적 패턴들의 이해는 ‘관계짓기’ 혹은 ‘통찰하기’ 혹은 ‘상호관계짓기’ 의 과정에 의해 도달되었다. 엽전 구멍에 실이 꿰어져 있는 그림을 상상해보면 되겠다. Chheng의 형제 중 한명이 말했듯이, ‘사람이 말을 듣고, 사건으로부터 배우고, 그들이 지식이 하나의 말이나 사건에 국한될때 마다, 이것은 단순하게 그들이 상호작용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Chheng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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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가 하세요. – 김영욱

5조 번역입니다.

패턴들을 완전히 이해하려고 하기 위해서 세계의 모든 무수한 현상의 패턴을 철저하고 완전하게 연구하는 것이 꼭 필요하진 않다. 이 패턴들 중 오직 하나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으로 우리의 그 목표를 달성할 수도 없다. 단지 현상의 많은 수를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그 패턴들이 자연스럽게 명백해질 것이다.

한 가지나 한 작은 그룹에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런 인식으로 가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chheng 형제의 신념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증했을 때 중국 학자들이 실패한 관점이라는 것이 특히 흥미롭다.

누군가 Cheng I-Chhuan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조사하는 것이 필요합니까. 아니면 하나만을 조사함으로서 간단히 수많은 패턴들을 알 수 있습니까?’ (I-Chhuan이 대답했다): ‘아니요. 그런 경우에서는 포괄적인 상호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Yen Tzu는 단지 하나만을 조사함으로써 모든 패턴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매일 하나를 조사한 뒤에 다른 것을 조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많은 경험이 축적된 후에 상호 관계가 있는 단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29

3조 번역 입니다.

내관, 즉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외물에 대한 연구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다시금 누군가가 정자(정이천)에게 물었다. ‘외물을 관찰하고 내면을 탐구하는데 있어, 외물들 중 우리가 무엇을 보고(인식하고) 있는지를 알기위하여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지요?’ (정이천이 답하기를):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외부의 세계(외물)와 자아는 공통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패턴(유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외물)”이 이해되면, “이것(내면 혹은 자아)”는 명확해진다. 이것이 내부와 외부가 하나가 되는 도이다. 학자(군자)는 모름지기 모든 자연을 관찰하고 이해해야 한다. – 한편으로는 하늘의 높음과 땅의 두터움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왜 하나의 (사소한) 물건이 왜 그러한가에 이르기까지.’

다른 이가 물었다: ‘지식을 늘림에 있어, (세계의 패턴(유형)을) 탐구함에 있어 “네 개의 시작들(사단 四端)”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철학자가 답하기를): ‘우리 자신의 본성과 열정 안에 존재하는 사단을 찾는 것은 당연히 간단하고 우리 가까이 있다, 그러나 모든 풀의 잎들과 모든 나무는 그들 고유의 패턴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탐구되어야 한다.’

‘새들, 동물들, 풀들과 나무들의 이름(그리고 속성들)에 대한 넓은 지식은 그것들의 패턴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방법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인식의 수준이 비록 르네상스기의 자연과학적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세 유럽의 학문수준과 그리 동떨어진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 이는 맹자를 암시한다. 맹자, II (I), vi, 5 (Legge (3), p.79).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적인 감정의 시작이고, 부끄럽고 싫어함은 옮음의 시작이며, 겸손함과 정중함은 훌륭한 예절에 이르며, ‘있어야 할 것(옳은 것)’과 ‘있어 서는 안 되는 것(옳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 것은 학문에 이른다. Cf. Hsiao Hsüeh Kan Chu, ch. 3, p. 16a. 역자 주 : 윗글은 영문을 번역한 글이고, 흔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맹자의 글에 대한 한국어 번역은 아래와 같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 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 心 智之端也].
  2. Honan Chhêng shih I Shu, ch. 18, pp. 8b, 9a.
  3. Honan Chhêng shih I Shu, ch. 25, p. 6b; 두 개의 문단은 tr. auct. adjuv. Graham (I). 자연의 역사의 가치에 대 한 언급은 다음으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Lun Yü, xvii, ix, 7. ㅇㅍ사한 문단이 다음에도 있다. Yang Kuri-Shan Chi, ch. 3, p. 66(§41)

30, 31

7조가 하겠습니다.

게다가 법칙에서의 역추론은 패턴 법칙을 연장한다든가 같은 패턴이 반복하는 과정이나 사물의 종류의 확장과 같은 등가물을 가진다. 때때로 후자가 논리를 추론하는 의미로 쓰인다. 쳉밍타오는 이렇게 썼다: 거의 모든 것들은 그들의 반대되는 짝을 가진다, 음과 양, 선과 악과 같은 교체가 있다. 양기가 활기를 띄면, 음기는 약해진다. 선이 증가하면, 악이 사라진다. 이렇게 패턴 법칙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그 밖에도: 무언가를 조사할 때 패턴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우주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면밀히 연구해야한다(연역적인 방법과 귀납적인 방법을 둘 다 해야한다.). 만약 패턴이 완전히 이해되었지만, 한쪽 상황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같은 종류 안의 다른 상황들에 대한 추론이 생길 것이다. 두 과정은(연역에 따른 귀납) 쳉아이촨이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표면적인 것으로부터 배우고, 그리고 그에 내포된 의미를 잡으려는 행위는 ‘이해‘라고 말해질 수 있다. 내포된 의미를 찾고 그것을 표면적인 것들과 연결하는 것은 ’통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럴 때 이해와 통합이 하나가 된다.

실험에 의해 우리가 검증 또는 무효화함에 도달했을 떄 새로운 유학자들은 학생들보다 더이상은 교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실험에 의한 시험에 대한 복종이라는 개념은 항상 막연하게만 존재했고, 중국 환경 안에서 일어난 것이 형성되어서 윤리학과 사회학에 의한 우정이 인식과 실지에 대조되었다. 이 논제는 수세기 동안 논의되었다. ‘행동은 쉽지만 아는 것은 어렵다’라는 문구가 모든 세기동안 확인되고 보류되고 또는 수정되었다. 17세기에 왕촨샨에 의해 지식은 실행의 시작이고, 실행은 지식의 완전체다 라고 말하였다. 사실 인식론적인 문제는 형이상학적 이상주의 또는 유물론에 대해 현재의 추세와 조화속에 변하는 질문들을 받았다. 이것들에 관한 많은 예들은 이미 이렇게 주어졌다. 예를 들어 Mohists에 대한 왕충에 대한 비평에서;

수정

  • 게다가 법칙에서의 역추론은 패턴 법칙을 연장한다든가 같은 패턴이 반복하는 과정이나 사물의 종류의 확장과 같은 등가물을 가진다: <수정:게다가, 법칙에서의 역추론은 ‘패턴 법칙을 연장하는것’ 또는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과정이나 사물의 종류 확장’ 안에 대조물을 가진것 처럼 보인다.>
  • 두 과정은(연역에 따른 귀납) 쳉아이촨이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수정: 두 과정은 (연역에 따른 귀납) 이 다음에서 쳉아이촨이 언급한 것이다.>
  • 17세기에 왕촨샨에 의해 지식은 실행의 시작이고, 실행은 지식의 완전체다 라고 말하였다: <수정: 17세기에 왕촨샨은 ‘지식은 실천의 시작이고, 실천은 지식의 완전체다’ 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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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조 번역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중국에서처럼 높은 정신을 가진 대표자들이 Norman과 Tartaglia와 비교해서 많았다는 것이며, 또한 Grosseteste 와 Paduan 인 과 교류하던 중세의 지식인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유럽 학자들과 신유학자들을 가깝게 볼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좌우간 대표자는 항상 우리의 동정심을 얻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대조되는 그 두가지 진술은 두 집단이 더 과학적인 사고를 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Thomas Aquinas(1226-1274) 는 ‘가장 높은것에 대한 작은 지식은 가장 하찮은것에 대한 풍부한 지식보다 더 낫다’ 를 썼다.그러나 Chheng Ming-Tao(1032-1085)는 불교에 대해 ‘그들이 낮은 것에 대한 공부를 하지않고 높은 것에대한 이해만을 고집할때 어떻게 그들의 높은것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다고 말할수 있는가’ 라고 말했다.

역사적 인과관계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없다. 그러나 16세기와 17세기 유럽에서의 현대과학의 발전은 기적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심지어 모호하게라도 설명되어 진다. 이런 발전들은 현상에 고립되지 않았다. 그것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산업적 대량생산이 따라오는 상럽의 자본주의와 함께 발맞추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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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가 할께요:)

오직 유럽에서만 잇달아 일어난 사회적이고 동시에 경제적인 변화는 마침내 자연과학이 고도의 장인, 즉, 준수학적기술자의 위치 이상으로 올라설 수 있는 환경을 형성했을 것이다(e). 모든 질의 양으로만 변화, 모든 현상의 이면에 있는 수학적 원리에 대한 확신, 전 우주에 걸친 균일한 없겠지만, 숫자로 질로 그리고 측량으로 계산되고 교환될 수 있었다. 이에 관해 우리의 수학자들은 풍부한 흔적을 남겼다. 복식부기 기술의 첫번째 학문적 공개는 16c 말 최고의 수학교과서인 Luca Pacioli의 de Arithmetica(+1494)에서 볼 수 있다. 공공 재정과 운영 문제에 복식부기가 처음 적용된 것은 기술수학자인 Simon Stevin(+1608)에 의해서였다. 심지어 Copernicus도 (그의 책 Monetae Cudendae Ratio of +1552) 금융개혁에 관해 서술했다. Robert Recorde의 책(Whetstone of Witte, +1557)은 모스크바로 가는 관료들과 탐사단들에게 바쳐졌는데, 그들의 여행을 통해 재화가 계속 증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 (e) 이러한 관점의 잘 알려진 실례는 Borkenau의 책 R.K.Merton의 저작 그리고 Hessen의 유명한 Essay(뉴턴으로 하여금 특정한 주제들에 대한 탐구에 매달리게 했던 당대의 지적 분위기에 대한 저작)등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관점들에 대해서는 Grossman, G. N. Clark, A. R. Hall 등 탄도학의 세부사항들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했던 이들에 의해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6조가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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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in의 Disme은 ‘모든 천문학자, 측량자, 태피스트리 치수를 재는 사람, 배가 나온 사나이 등과, 모든 조폐국장과 상인들, 행운을 빌어요!(a)’ 라는 말로 시작한다. 심지어 훌륭하고 헌신적인 선교사의 친척은 Francesco Ricci는 1659년에 Macerata에서 회계에 관한 책을 출간했다. 이런 예들은 무제한 늘어날 수 있다. 상업과 산업은 유례없이 ‘성행하고’ 있었다. 아마, 근대 과학 기술과 그것의 기원인 사회경제적 상황 사이의 정확한 관계의 문제는 유럽에서 과학의 역사의 거대한 논쟁을 구성할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그 주제를 다시 한 번 언급하겠다(b). 농경사회이면서 관료사회였던 중국과 같이 유사한 문명의 연구는 머지않아 서구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단서를 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후기 르네상스 과학의 원인에 대한 사회경제학 이론의 비판에 있어, Korye와 Cassirer는 그리스 수학의 재발견과 Platon과 Pythagoras의 영감 아래 고무된 순수 이론적인 풍조가 있다고 주장한다(d).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e). 그의 말에 따르면 사회경제학 옹호자들이 천문학의 독립적인 발전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 한다고 한다.

(a) 이 예들은 Zilsel에 따른 것이다.

(b) 중국과 서구의 과학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인 요인들에 대한 단락 48, 49를 참조할 것.

(d)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들이 각자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공적 조화에 도달하리라는 자본주의의 생각들이 우연히 군집한 원자들에 대한 기계론적 개념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명확히 이해했다. Malyne의 Lex Mercatoria 등의 책은 이러한 비유관계가 17C에 얼마나 의식적이었는지 보여준다.

(e)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고 개개의 사물을 고립된 것으로 간주했던 중세의 유명론의 특정한 학파에서 또 다른 흐름이 발견된다. 이러한 관점과 수학적, 기계론적 세계관 사이의 연관성은 그 동안 과소평가되었던 Conze의 책에서 명료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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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가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국에서 비교할 만한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느냐가 어떠한 관점이 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선박을 위한 제조 기술, 거대한 운하 체계를 위한 유체정역학(네덜란드와 같은), 총기류에 관한 탄도학(결국, 중국인들은 유럽보다 4세기나 앞서 화약을 보유하게 되었다), 광산에서의 펌프 기술에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그들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대답은 (위의 기술들의) 황제 관료주의 지배 하에서, 중국 사회는 이러한 기술들로부터 거의 혹은 전혀 사익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들의 기술과 산업은, 위의 ‘semi-mathematical’ 장에서 언급된, 저자에 가까운 사람들의 책에서 묘사했듯이, 눈에 보이는 큰 이익을 위한 진취적인 투기적 무역상인의 창조물이 아닌, 관료주의적 압박이나 혹은 최고의 보호감독 아래 수세기 동안의 점진적 성장의 생산물이라 할 수 있는, 모두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것이었다. 천문학의 경우를 보자면,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담을 역법을 내보여야 하는 태고의 관습에 따른 중국 황실의 천문학에 대한 필요성보다 그 체계를 확립시키고자 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중국의 천문학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천문학의 자발적 발전이 자연 과학의 수식화를 야기하는 것이었다면, 중국에서 왜 이것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혹은 왜 벌써 일어나지 않았었나 알아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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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번역 수정했어요~

만약, 그 필요성이 매우 컸다면, 기존의 수학적 기호들의 결합을 파열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유럽에서만 일어났던 과학적 발견들을 만들어냈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요구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대과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그런 원동력은 분명히 아니었으며, 그 결과 중국 고유 수학은 거의 사라져 갔다. 또한 Mei Ku-Chheng과 그의 추종자들의 세심한 노력이 부활시켰던 힘도 분명 아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연과학으로부터 어떠한 강렬한 요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자연(자연법칙)에 관한 관심이나 대조군과 실험군이 설정된 실험이 부족하였으며, 경험적 추론은 물론, 일식, 월식에 대한 예측과 날짜 계산(달력 작성) 역시 불충분했다. 분명하게, 상업적 문화만이 농경행정문명(농경사회)이 할 수 없는 것을 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전에는 서로 분리되어 있던 수학과 자연과학지식을 융합시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