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오래 전에 졸업한 제자와 간만에 잡담을 하게 되었는데 새로 올라온 글이 있는지 보려고 내 홈페이지에 가끔 들른단다. 이크, 뜨끔하였다. 최소한 한달에 한번은 글을 올린다고 했었지만 최근 6개월간은 전혀 글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급하게 왜 그동안 글을 올리지 않았는지 변명을 올리기로 했는데 사실 게으름 말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최근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는데 “열혈강호”라는 만화가 연재 30주년을 맞이했다는 기사였다. 한국만화 115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라는데, 젊었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세월을 이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귀한 일인가를.

오랫동안 연재된 만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있다. 대학생 시절, 열심히 다니던 만화방이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 가게에 있는 만화를 대부분 다 봐 버려서 그동안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순정만화코너로 갔다. 거기서 30권 정도 쌓여있는 황미나 작 흑나비라는 만화책을 보게 되어 이 정도면 두어 시간 보낼 수 있겠군 하면서 보기 시작했는데 웬걸 쌓여있는 책들을 반 넘어 볼 때까지도 이야기의 전개 속도상 나머지 분량으로 만화가 마무리되지 않을 것 같아 확인해 보니 정말 그렇다. 주인 아주머니께 ‘이거 마지막 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여쭤보았더니 ‘그거 7년째 나오고 있는데 언제 완결될 지 몰라요’라고 하셨다. ‘이렇게 오래 연재되는 만화도 있나?’ 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나중에 (십 몇년인지 몇 십년인지 후에…) 알고 보니 그 만화는 유리가면이라고 하는 일본만화며 1976년에 연재를 시작하여 이 글을 쓰는 2024년 지금까지도 완결이 안 됐다고 한다. 48년 동안 연재되고 있다는 얘기다.

말이 나온 김에 세월을 이기고 오랫동안 운영되고 있는 홈페이지도 하나 소개한다. 이장훈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수학생각 홈페이지(http://mathought.com)다. 오늘이 홈페이지 개설 8597일째니 약 23년하고도 202일째 운영되고 있다는 건데 참 대단하다. 내 홈페이지는 과연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아, 잠시 옆길로 샜다. 그동안 글을 올리지 않은 데에 대한 변명을 하기로 해 놓고선. 얄팍한 변명은 다음과 같다. 이제 나도 정년을 몇년 남기지 않은 나이가 되어 앞으로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수학자로서, 대학교수로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양성덕의 미분기하강의 2,3편을 출간하였고 이제 내년 봄에는 1편을 출간하여 졸저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수학으로 약간의 흔적은 남기게 되었는데 문제는 수학연구, 수학교육에 관련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나의 생각 또한 조금은 남기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젓가락질’ 같은… 그리고 그런 글은 여기 수학과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이 부적절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차라리 tistory나 brunch 같은 곳에 올리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잠시 주춤하다 보니, 그리고 다른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쉰다는게 그 기간이 조금 길어져버렸다. 아마 내 홈페이지에 글이 안 올라오는 걸 눈치챈 사람은 80억 명 중에서 한두 명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그 한두 명에게 보내는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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